일회용 인간도 인간이다.

2009. 12. 12. 01:29Review



자본주의.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저 단어만큼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자본주의가 인간은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현실을 꼬집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이상향에 대한 화자의 갈망과 어린 시절의 어쩌구…..”라고 설명하는 것 만큼 재미없는 해설은 없으니, 굳이 이 영화에 자본주의 어쩌구 하는 설명은 가져다 붙이지 말자.



‘문’은 한 편의 모노드라마다. 달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 에너지로 지구를 먹여살리는 미래. 주인공 샘은 우주 공간에서 혼자 생활하며 채집한 에너지를 지구로 보내는 3년 계약직 근로자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은 우주선과 달 표면 뿐이고, 등장하는 인물은 샘 하나 뿐이다. 그런데. 샘은 사실 하나가 아니다.


계산은 간단하다. 매주 마트에 장보러 가는 것보다는, 집안 창고에 식료품을 잔뜩 꺼내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오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그래서 주인공 샘도, 3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지구까지 오는 수고 대신, 기지에 숨겨진 창고에서 복제된 또 다른 샘으로 대체된다. 물론 조작된 기억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본인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를 뿐더러, 3년 후에는 지구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려준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고와 샘의 돌발행동으로 5번째 복제인간 샘과, 6번째 복제인간 샘이 서로 마주치게 된다.

샘들의 고용주인 회사에서는 이 둘의 만남을 방관할 리 없다. 구조팀(?)의 도착을 앞둔 두 샘의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서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지만 때때로 공유된 기억을 나누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결국 샘은 샘을 도와 샘을 지구로 탈출시켜주기로 한다. 어느 샘이 어느 샘을 돕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샘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될 운명이었던 자신도 돕기로 마음을 바꾼다. 감독은 그렇게 이타심과 이기심을 교묘히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3년의 계약기간밖에 살지 못하고 가진 기억조차도 심어진 것에 불과한 복제인간이지만, 샘은 정말 인간적이다.


아! 영화에는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그는 샘을 돕고, 새로운 샘을 깨우는 역할을 맡은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다. 조그만 스크린에 떠 있는 작은 스마일 마크가 거티의 얼굴이다. 그 단순하고 기계적인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샘 몰래 무언가 음모(?)를 꾸밀 것 같았던 나의 의심을 져버리고, 거티는 끝까지 샘을 위해 봉사한다.

SF이면서도 한 편의 모노드라마인 새로운 영화, 문을 만들어낸 던컨 존스 감독은 꽤 주목받는 신예인 것 같다. 더구나 그는 한국을 꽤나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보고, 샘을 고용한 회사를 미국과 한국의 합작회사로 설정했다. 영화에서 처음 ‘사랑’이라는 한글을 보았을 때는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영화 더 문은, 뉴 문에 상처받은 내 마음을 위로해준 참으로 영화다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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