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만큼도 바뀌지 못하는 인간.

2010. 10. 3. 23:58Essay

출근길. 오늘도 간발의 차이로 타야 할 버스를 놓쳤다. 어쩌면 이렇게도 매일 똑같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버스가 지나가는걸 바라봐야 하는 걸까.



경기도 광주에 사는 나는 빨간색 1150번 버스를 타고 다닌다. 먼 거리를 다니다 보니 일찍 출근해서 늦게 귀가하느라 항상 잠이 모자라다. 서울역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야 모자란 잠을 보충하며 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지하철로 갈아타는 코스를 잡을 수밖에 없다. 자연히 버스에서 잘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든다. 그 중요한 버스를 나는 항상,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친다. 1분만, 아니 30초만 빨리 나와도 탈 수 있는 것을! 단 30초만큼도 변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



여자친구와 싸울 때마다, 나는 또다시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내가 타야할 버스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노력하자'는 다짐은 단 30초만큼도 우리를 바꾸지 못했다. 똑같은 시비거리, 똑같은 말싸움, 똑같은 상처. 변하는 것이 있다면 점점 더 서로의 상처에 무뎌져 간다는 것. 점점 더 서로에게 치명적인 말들을 내뱉게 된다는 것.

난 결국,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1150번 버스를 놓치면, 나는 1500-2번 버스를 타고 사당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탄다. 1150번 버스에 대한 미련을 버린 후로는, 1500-2번을 타고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는 일이 그다지 수고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대신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서 떠나가는 1150번 버스를 보며 담배를 꺼내문다.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울 때쯤이면, 1500-2번 버스가 도착한다. 빈 자리에 앉아 서둘러 모자란 잠을 청하며 생각한다. 나는 30초만큼도 바뀌지 못하는 인간이다. 어쩔 수 없이 30초를 포기하는 방어적 인간. 하지만 이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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