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루

2011. 5. 4. 01:15Essay

집에 오는 버스를 탔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여유있게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서울역에서 회차하여 명동을 가로질러 한남대교에 올라탄다. 다리 너머로 검은 한강물, 노란 불빛들, 그리고 그 위로 마저 어두워지지 못한 붉은 밤하늘이 뒤덮였다. 버스는 계속 달려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선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잿빛 소음방지벽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텅 빈 도로 위를 달리는 텅 빈 버스에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이 낯설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두 눈에게 매일 똑같은 몇 개의 장면만을 보여줬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두세가지 뿐이다.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에 다가오는 1500-2번 버스의 모습, 지하철 환승역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 그리고 하루 종일 책상위의 모니터…… 다시, 집으로 오는 버스의 모습…… 고작 이 몇 개의 장면들이 나의 하루 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익명의 사람들이 몇몇 얼굴을 비추었다 사라질 뿐이다. 내 두 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미 생활복이 되어버린듯 늘어진 정장에 아무렇게나 서류가방을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도 아마 평생을 같은 장면으로 채워왔으리라. 어느날부턴가 단 하나의 하루만이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저렇게 터벅터벅 한발짝씩 걸어왔을 그들을 한참 지켜보다가, 나도 터벅터벅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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