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아이코스, 금연.

2018. 11. 10. 14:18Essay

1.

매트릭스 2편이었던가 3편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을 앞에 두고 알아듣지 못할 프랑스어를 한참 지껄이고는 이런 얘기를 한다. 프랑스어로 욕을 하면 기분이 좋다. 마치 고급 비단으로 똥을 닦는 것과 같다. 너무나 괴상한 비유였지만, 한편으로 상당히 공감했다. 우아하고 고급진 것의 상징으로 가장 지저분한 일을 처리한다는 역설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는 좋은 면 못지않게 나쁜 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매력을 만든다. 좋은 면만 있다면 그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그래서 세상 모든 누나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박보검을 보면서 나는 위화감을 느낀다. 찌질한 한남의 뻔한 질투일까? 그러기엔 나와는 너무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분이라 그런 종류의 불편함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2.

그래서 요즘 담배를 끊었다. 그동안 담배는 나에게 존재하는 나쁜 면의 일부였다. 대체로 착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평가받는 가운데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면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과음을 하고,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담배를 피고, 상스럽게 누군가를 욕하며 험담하는 나쁜 면. 그것이 주는 일말의 해방감이, 필요한 순간 나를 좋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했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피해는 될지언정, 사람사는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상식 수준의 꼬장 같은 것.


나는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필요에 따라 영리하게 드러내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담배는 그 수단 중의 하나였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너도 담배펴?’라는 한마디로 순식간에 사이를 좁힐 수 있었다. 서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느끼는 그 은근한 동지애. 여자들은 대체로 흡연자를 싫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단점이 매력으로 보였으리라고 확신한다. (설명하자니 나만의 착각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게 느껴지지만, 그 착각에 기초한 자신감 그 자체가 매력이었을 것이라고 굳이 부연설명을 붙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내 멋대로의 생각이니까.)


3.

그런데 어느날 아이코스라는 신기한 물건이 나타났다. 처음엔 그런 매력없는 물건을 거들떠볼 생각도 없었지만, 새로운 방식이 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담배처럼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열로 가열해서 발생하는 증기를 흡입하는, 몸에도 훨씬 덜 해로운, 담배계의 아이폰. 그건 정말 애플의 아이폰처럼 세련되고 깔끔한 IT기계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 세련됨이 담배가 가지고 있던 나쁜 면을 거세시켰다는 점이다. 담배의 나쁜 면은 모두 태워버리고, 깔끔하게 히팅된 증기는 가장 효과적으로 니코틴만을 충족시킨다는 기능적인 행위만을 남겨놓았다. 그것은 마치 지겹고도 지난한 연애속에 미움과 사랑과 집착, 소유욕을 모두 담아 도달한 섹스의 번거로움을 모두 벗어던지고, 하룻밤 욕정만을 충족시키는 섹스파트너 같은 것이다.


10년이 넘게 피우던 담배를 막상 끊으려니 쉽지는 않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흡연의 본질은 니코틴 중독일 뿐이다. 사랑의 본질이 결국 종족번식 욕구로 설명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기꺼이 사랑이라는 착각에 뛰어든다. 그 착각을 걷어내는 순간 삶은 비루해진다. 지금 니코틴 중독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그렇게 비루하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그냥 끊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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