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베, 꼰대.

2019. 10. 30. 14:43Essay

하람베. 1999년 태어나 2016년 미국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키워지던 고릴라의 이름이다. ‘하람베’는 ‘함께 일하다’는 의미다.

하람베를 구경하려던 3살짜리 어린아이가 우리 안으로 떨어졌고, 10분 후 하람베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사살되었다. 그 10분간 하람베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지켜보거나 우리 안을 끌고 다녔다. 현장의 관계자들에게는 아이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조치다. 나중이지만 이런 행동이 고릴라가 어린 새끼를 보호할 때 보이는 행동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람베의 마음을 우리가 알 길은 없다. 갑자기 우리에 떨어진 아이를, 새끼 고릴라처럼 보호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람베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하람베는 오직 행동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과 고릴라의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아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만 서로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의도가 보호가 아닌 공격이었다면, 인간에게 그 위험마저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단호하게 하람베의 죽음을 확정 지어야만 했다.

 

‘꼰대’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불확실한 위험의 시간을 통해서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하람베와, 그 불확실한 위험을 감당할 필요가 없는 인간 사이의 거리를 떠올린다. 젊은이들 앞에 나는 오직 ‘꼰대’가 아님을 증명한 후에야 말을 건낼 수 있는 (그 언어마저도 통하지 않을) 하람베가 된다. 내가 건네는 손이 곱고 매끈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두껍고 북슬북슬한 고릴라의 그것이라는 이유로, 나에게는 쉽사리 ‘꼰대’라는 총알이 날아든다. 하람베가 안전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내 우리 안으로 떨어진 그 인간에게 섣부른 손을 내밀기보다는, 그 인간을 피해 고릴라 무리로 숨어드는 것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은 누구의 터전이었는가!)

 

솔직히 말해 나는 스스로가 ‘꼰대’인지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단언컨데 나의 20대는 그 누구보다 꼰대스러웠으나, 이제는 그러기엔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과, 실종된 정의,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들어놓고도 가증스럽게도 어른 입네 하는 기성세대들. 심지어 귀 막고 눈 감은 채 그 불합리한 시스템에 기생하는 동년배들까지 모두가 어린 나에게는 분노와 공격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유순하고, 개방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사람인가. (바로 이 부분에 ‘이 사람이 꼰대인 이유’라는 태그가 달릴 법 하지만)

 

문득 세상을 돌아보니 ‘꼰대 아니냐’는 공포탄으로 시끄럽다. 명백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 ‘니 말이 맞지만 그렇게 말하면 꼰대’라는 위협사격이 가해진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고릴라 무리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이다. 숨어들 무리가 없어진 하람베는 어디로 가야 할까. 고릴라로 태어나 고릴라의 언어로 살아온 하람베는, 이제는 밑도 끝도 없는 ‘꼰대’라는 딱지가 무서워 평생을 쌓아온 경험과 가치판단과 고민, 그 끝에 이어지는 주장을 입밖에 낼 수조차 없는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꼰대’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입밖에 내지 않는 생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꼰대가 악이 아니듯, 젊음도 선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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