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2. 눈오는 날 퇴근 후

2021. 1. 12. 23:55Essay

2021. 1. 12. 눈오는 날 서교동

눈이 왔다. 낮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바로 며칠 전 퇴근길에 내린 폭설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은 서둘러 피씨를 끄고 퇴근을 했다. 덕분에 나도 미련 없이 컴퓨터를 끄고 퇴근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6시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데도 아직 날이 다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저녁거리를 사러 집을 나서며, 카메라를 챙겼다. 오랜만이다. 카메라와 함께 집을 나서는 일은.

 

눈에 보이는 골목마다 카메라를 들고 들어섰다. 별것 아닌 골목길도 눈이 쌓이면 고요하고 정겨운 풍경으로 바뀐다. 며칠 전 지나가다 눈에 들어온 커피 원두가게에 들러 원두를 골랐다. 과테말라, 브라질, 케냐, 콜롬비아... 온갖 나라의 이름이 붙은 플라스틱 통에 원두가 제각기 다른 높이로 남아있다. 통이 왠지 익숙하다. 그리고 보니 이 가게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가게 이름이 어딘가 낯익어서다. 굳이 아는 척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아는 척을 해본다. 혹시 이 가게가 예전에 상수에 있던 가게인가요? 점원은 신기해하며 그렇다고 말한다. 무척 오래전 일이라며. 그렇게까지 오래전이었던가? 상수에 살 때 항상 이곳에서 원두를 사다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사 온 이곳에서 또 이 가게가 보여 들어와 봤다고 얘기했다. 문을 닫아 아쉬운 단골가게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대로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위안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멀어져만 가는 것은 아니구나.

 

커피를 들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항상 참 멋진 가게라고 생각하는 미용실을 찍었다. 정확하게는 미용실 정원의 나무다. 어딘가 외롭고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퇴근 할 때마다 마주하는 내 마음 같은 모습의 나무를 찍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 저녁을 해 먹고, 컴퓨터로 사진을 옮겨와 편집한다. 능력이 있다면 원할 때마다 언제든 이런 느낌을 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우연하게 찍힌, 허옇게 뜬 사진을 행운으로만 만나볼 수 있다.

 

다른 사진들도 꽤 맘에 든다. 눈이 아프도록 사진을 편집하고 구글 사진첩에 업로드하고, 다시 핸드폰에서 인스타용으로 리사이즈를 한다. 리사이즈 한 사진은 한장 한 장 따로 인스타에 올렸다. 여러 장의 사진이 겹쳐져서 한 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왠지 억울하다. 사진을 처음 마주했을 때, 사진이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슬라이드로는 느낄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잘 나온 사진 뒤에 은근슬쩍 아까운 사진을 끼워 넣는 것도 어딘가 비겁하게 생각된다. 평소에는 잘도 하던 일을.. 새삼스럽지만 오늘은 그랬다.

 

내 마음에 드는 사진은, 인스타에는 언젠가 따로 올려야지.

오늘은 이 사진을 놓고 이렇게 끄적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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