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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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엄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친구 결혼으로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날 아침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전날 마신 술이 채 깨지 않은채로 급하게 운전해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백수를 누린 할머니는 생전에 쌓은 덕으로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땅에 묻혔다. 때때로 슬픔과 울음이 터져나왔고, 때때로 웃음과 장난이 오가며 그렇게 잔치처럼 저 세상으로 떠났다. 시집간 큰딸의 막내이자 장남인 나를 볼 때마다 할머니는 '왔냐' 한마디에 애정과 믿음을 담아 보냈다. 그것이 유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 살갑지는 못했지만 깊은 유대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나에게도 이어졌다.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부터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며 종종 '칠갑산'을 흥얼거렸다. 그땐 몰랐는데 ..
2018.10.21 -
나의 가치
나의 가치를 입증해 보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내가 가진 생각, 내가 하는 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무엇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일인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를 보란듯이 내보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보란듯이 내가 얼마나 멋진 인간인지를 자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대부분은 실패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이 아닌 가상의 장미빛 미래일 뿐이니까.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나에 불과하다. 새로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바로 지금 현재 순간까지 현실에 드러난 나. 혹은 그마저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
2018.01.14 -
형식의 예절
경조사가 많은 주말이었다. 한 번의 결혼식과, 두 번의 장례식이 있었다. 오래 머무르지는 안았지만 잠깐이라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왔다. 사회생활에 요령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장례처럼 어려운 일에는 꼭 다녀오려고 한다. 마음이 힘든 순간에 누군가 찾아와 인사를 건내고 돌아가는 것 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된다. 굳이 어떤 위로의 말을 건내야 할지, 어떻게 내 마음을 다 전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정해진 형식을 따라 예절을 갖추는 것 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된다. 나는 인간관계에 요령이 좋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한참 후에 뒤늦게 내가 안해도 될 말을 한건 아닐지, 괜한 짓을 한건 없는지 고민에 빠지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고민은 굳이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어떤 마음..
2017.12.17 -
이것이 나의날
이것이 나의날 하고 나서 하지 말걸후회하는 것과하지 않고 나서 할걸 하며후회하는 것 한편에서 마주하는 후회의 크기그만큼의 다짐으로뒤도 돌아보지 않고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다시 또 반대편으로 시계추는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가보다멈춰 고민할 틈도 없이지는게 무서운 꽃을 남겨두고도봄이 또 왔다
2016.04.09 -
내가 줄 수 있는 것
네번의 연애를 했다. 세번의 연애는 지나갔고, 네번째 연애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떤 연애는 무모했고, 어떤 연애는 뜨거웠다. 어떤 연애는 무겁고 느린 달빛같았고, 어떤 연애는 밝고 눈부신 햇살 같았다. 하지만 모든 연애의 과정은 같았다. 처음엔 설레었고, 곧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가, 결국 그 감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 어떤 연애도, 설렘과 맹목의 시간은 지나게 마련이었다. 연애 초기 맹목의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내 연애 상대가 일상 속의 내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를 바랬다. 매일 아침 전화를 하지 않아도, 끼니때마다 무얼 먹었는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아도, 바쁜 일로 며칠동안 만나지 못하게 되도, 각자의 일상은 즐겁기를 바랬다. 내가 더 이상 그녀의 모든..
2014.06.09 -
같은 하루
집에 오는 버스를 탔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여유있게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서울역에서 회차하여 명동을 가로질러 한남대교에 올라탄다. 다리 너머로 검은 한강물, 노란 불빛들, 그리고 그 위로 마저 어두워지지 못한 붉은 밤하늘이 뒤덮였다. 버스는 계속 달려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선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잿빛 소음방지벽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텅 빈 도로 위를 달리는 텅 빈 버스에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이 낯설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두 눈에게 매일 똑같은 몇 개의 장면만을 보여줬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두세가지 뿐이다.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에 다가오는 1500-2번 버스의 모습, 지하철 환승역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 그리고 하루 종일 책상위의 모니터..
2011.05.04